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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역사적 6 10 민주항쟁 일 입니다.

 

당시 저는 성인이 아니었으나 그당시의 상황을 매스컴을 통해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518과는 다르게 전국적인 범국민적 운동이었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통력직선제를 요구하고 거기에 박종철군..이한열군 에 대한 내용들이 끊임없이 뉴스를 통해 흘러나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현재 우리가 누리고있는 이 자유는 결코 공짜로 얻은것이 아님을 다시한번 상기해 봅니다.

 

 

 

■ 6 10 민주항쟁 역사적 배경

 

 

1987년, 군사 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의 대통령 임기가 마무리되던 그해에 시민들은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겠다"라며 직선제를 요구하던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개헌논의 (대통령 직선제 논의) 중지와 제5공화국 헌법에 의한 정부이양을 핵심내용으로 하는「4·13호헌조치」를 발표하였습니다.

 

이에 사회 각계 인사들과 시민들은 대통령직선제를 요구하며 비난 성명이 이어지는 가운데, 그해 5월 27일 재야세력과 통일민주당이 연대하여 형성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발족되었으며 이후 국민운동본부는 육십항쟁의 구심체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그사이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이 치안본부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던 중 숨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정부는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라며 거짓 사망 원인을 발표했습니다.

 

 

이에대해 1987년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공식성명을 통해 당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조작·은폐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하기 시작했고 전국적으로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는 6월 10일 ‘박종철군 고문살인 조작·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전국적으로 개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 6 10 민주항쟁 경과

 

 

분노한 국민들은 6월 10일 오후 6시 거리로 뛰쳐나왔고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를 외쳤습니다.

 

당시 6월 10일의 분위기는 1980년, 광주만이 홀로 집결했던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습니다. 서울, 광주, 부산, 대구, 대전 등 곳곳에서 민주화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도로 위에서 경적을 울렸고 회사원과 승객들은 손수건을 흔들었으며, 학생들은 시위 참여자들에게 물과 도시락 등을 전달하는 등 민주화 물결에 동참했습니다.

 

 

반독재와 대통령 직선제를 염원한 시민들의 처절한 투쟁의 시작이 6월 10일이었습니다.

 

한편 1987년 6월 9일 연세대학교 학생들은 6월 10일로 예정된 국민대회에 출정하기 위해 연세인결의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이날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중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1987년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공식 주도한 이날 6 10 민주항쟁은 서울을 비롯한 전국 22개 주요 도시에서 약 24만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날 경찰은 6만여 명의 병력을 투입했지만, 전국 각지로 분산된 경찰 방어력은 자신의 커다란 한계를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게다가 시위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산발적인 야간시위와 철야농성으로 이어지면서, 지속적 투쟁의 형태를 띠고 있었으며 특히 서울 명동성당 점거농성은 6월 15일까지 계속되었는데, 이는 항쟁의 지속과 전국적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국민운동본부는 산발적 시위투쟁을 다시 결집시키기 위해 6월 18일을 ‘최루탄 추방의 날’로 선포하고 최루탄 추방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으며 이날 전국 16개 도시 247곳에서 일제히 시작된 이 대회에는 무려 150여만 명의 민중이 참여하였습니다.

 

이날 부산 지역 시위에서 이태춘은 경찰의 다연발 최루탄 난사 직후 얼굴 전체에 최루탄을 뒤집어 쓴 채 고가도로에서 떨어져 숨지고 말았습니다.

 

 

6월 24일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과 야당 대료 김영삼의 여야 영수회담이 결렬되자, 6월 26일 국민운동본부는 ‘국민평화대행진’을 강행하였는에  이 날의 평화대행진은 사실상 유월항쟁의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전국 34개 도시와 4개 군에서 130여만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경찰의 원천봉쇄 방침에도 불구하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으며 이날 경찰은 전국적으로 10만여 명의 경찰병력을 배치했으나 효과적인 진압작전을 벌이지 못하였고 전국적으로 경찰서 2개소, 파출소 29개소, 민정당 지구당사 4개소 등이 파괴 또는 방화되었으며 3,467명이 연행되었습니다.

 

이 날의 평화대행진은 당시 민주화투쟁의 열기를 한군데로 집약시킨 결과물이었고, 결국 전두환 정권은 직선제 개헌과 제반 민주화조치 시행을 약속하는「6·29선언」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 6 10 민주항쟁 결과와 역사적 의의

6 10 민주항쟁은 전두환 정권 출범 이후 점증된 민주화 열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제5공화국의 실질적 종말과 역사적인 대통령 직선제를 관철함으로써 장기적인 군부독재에서 실질적인 민주적 문민정부 의 시대를 다시 가져오면서 한국현대사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뿌리내릴수 있는 역사적 출발점이 되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이를 본 전두환 정권은 큰 물결을 거스를 수 없다는 걸 깨달았으며 결국 6월 29일, 직선제 개헌안을 승낙하며 시국 수습 방안을 발표했으며 이 선언으로 인해 1987년 10월 마침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뤄졌고, 12월에는 박정희 유신 이후 최초로 국민의 직접 선거로 대통령이 선출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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